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대표 폐사지(절터)를 소개해 본다.
1. 합천 영암사터
영암사터에는 통일신라 3대 쌍사자 석등 중 하나이며 보물 353호로 지정된 마모가 심한 쌍사자 석등이 있고, 불국사의 석축과 유사한 양식의 석축이 있으며, 승탑 귀부 2기와 3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영암사터 뒷산인 묘산(합천사람들은 이 산을 작은 금강산이라 칭함)은 화강암 바위 경치가 매우 좋은 산이다.
우리나라 절터 중 최고의 절터인 익산 미륵사터나 경주 황룡사터를 두고 내가 이 영암사터를 먼저 올린 것은 이 절터의 쌍사자 석등과 관련된 합천군 가회면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1933년 어느 야밤에 다수의 일본인이 이 쌍사자 석등을 훔쳐갔으며, 이들의 이동 모습을 본 이웃 주민들로부터 뒤늦게 알게된 가회면장 허씨와 마을주민들이 불을 밝히며 의령군 대의면까지 쫓아가서 석등을 되찾아 오고, 해방 후 1959년 면사무소에 보관 중이던 이 석등을 제자리에 돌려 놓고 무너진 3층석탑도 바로 세웠을 뿐 아니라 절터까지 복원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 절터에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관리능력도 힘도 없었던 이씨 조선의 산하에서는 일본인 문화재 약탈 수집상과 이에 야합한 국내 장물아비들이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며 불탑이나 승탑을 무너뜨려 사리함의 문화재를 훔쳐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지역 유지들에게 후원금이나 지원금 명목으로 푼돈을 쥐어 주고 각종 문화재를 통째로 서울, 부산, 대구의 일본인 수집상들 소재지나 국외인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합천군 가회면 면장과 마을 주민들은 일심으로 단결하여 조상들과 합천 가회면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쌍사자 석등을 지켜낸 것인데, 당시의 국내 상황으로 볼 때 대단히 드문 사건으로 이는 합천군의 자랑이고 가회면민들의 승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훌륭한 합천군 가회면 사람들에게 필자는 존경심을 느낀다.
2. 보령 성주사터
9산선문 중 성주산문의 종조사찰로써 당나라에 유학을 가 마조도일의 제자 마곡으로부터 법을 배워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한 무염(낭혜화상- 무설토론을 주창)이 개창한 산문으로 무염은 문하에 심광. 여엄. 대통. 자인. 영원 등 신라 말 고려 초기 선종의 수많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다.
문화재로는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4산비명 중 하나이며 통일신라 석비를 대표하는 낭혜화상 탑비(국보 8)와 무염의 승격과 노력이 느껴지는 수준 높은 보물로 지정된 5층석탑, 3층석탑 3기, 석등, 돌계단, 석불입상 등이 있다.
3. 서산 보원사터
법인국사 탄문의 보승탑과 탑비, 5층석탑, 당간지주가 있으며, 철불 2점과 금동여래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중 철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철불 중 최고의 수작 중 하나로 손꼽는다.
보원사터 바로 뒷산에는 개심사가 있으며, 계곡 아랫쪽 건너편 산 중턱에는 서산마애3존불이 있다.
하루만에 이 곳들을 다 둘러볼 수 있어 적극 추천하는 절터이다.
4. 양양 선림원터
여주 고달사 등 여러 선승을 찾아 수행한 홍각선사가 돌아와 머문 사찰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도를 구하는 바람에 한 끼 살 씻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 계곡의 이름이 미천(米川)골이 되었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홍각선사 탑비, 3층석탑, 석등, 승탑이 있으며 국립 미천골자연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호젓한 계곡 안으로 제법 들어가다 보면 왼쪽 언덕 위에 절터가 있는데, 길이 먼 관계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노력에 100% 보답을 하는 우수한 문화재들이다.
5. 여주 고달사터
창원 봉림산문(9산선문 중 하나)을 세운 심희의 스승인 현욱, 심희의 제자인 원종대사 찬유가 머문 곳으로 고려 광종 때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3대 부동산문으로 지정되어 사세가 크게 된 절터이다.
문화재로는 승탑으로는 최고 수준의 걸작 중 하나인 국보 4호 고달사터 승탑과 원종대사 찬유의 탑과 탑비, 석대좌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고려시대에는 무척 드문 앙증맞은 쌍사자 석등이 있다.
6. 남원 만복사터
고려 문종 때 창건된 사찰로 문화재로는 보물로 지정된 5층석탑, 당간지주, 불상좌대, 석불입상이 있음.
남원시내에 있으며 만복사터를 낮은 동산과 주택들이 둘러싸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절터이다.
즉, 만복이 깃든 자리에 절을 지었던 것이다.
7. 익산 미륵사터- 3탑 3금당식 백제 최고의 절터이다.
삼국유사 권제2 제2 기의 하편의 무왕부에는 서동(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신라 진평왕의 세쨋딸)와의 러브스토리인 '서동요'와 관련된 구전 전설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2009년 서탑 해체시 발견된 사리장엄구 사리봉안 기록판에 의하면 639년(백제 무왕40)에 무왕의 왕후 시주로 건립되었다고 하니 구전과는 많이 달라서 추후 더 역사적 자료가 나오기 까지 많은 논란이 있을 것 같다.
문화재로는 우리나라 석물의 시초 격이면서 백제 왕실과 장인들의 대담한 스케일과 위대한 솜씨가 느껴지는 미륵사 석탑(국보 11), 당간지주(보물 236), 석등이 있다.
그리고 이 석물들은 이후의 우리나라 수많은 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석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훌륭한 스승 밑에 뛰어난 제자가 있듯이 우리나라 석탑과 석등 등 각종 석물들이 세계적인 수준이 되는 데에 초석과도 같은 석물들이니 자세히 둘러 보시길 바란다.
8. 중주 미륵리절터
주흘산 하늘재 아래에 있는 절터로 고려시대 작품인 보물 문화재인 석불입상, 5층석탑, 석등 2기, 귀부, 석축 등이 있다.
이 절터는 내가 약 35년 전 즈음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받았던 신선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는 절터이다.
9. 홍천 물걸리절터
국가 보물 문화재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수작의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대좌, 불대좌 및 광배, 3층석탑이 있다.
홍천 물걸리는 백두대간 윗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 고려시대가 아니고 통일신라시대의 빼어난 유물이 있다는 것이 좀처럼 잘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수작의 석물들만 말없이 서 있고 사찰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 이 사찰의 역사에 대해 거저 안타깝기만 하다.
아마도 추정컨대 통일신라 시대 홍천지역을 관리했던 지배자가 뛰어난 석물 명장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는 뛰어난 문화재들이다.
10. 원주 거돈사터, 흥법사터, 법천사터
원주지역에는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대단히 수준 높은 석물들을 간직한 절터를 만나 볼 수 있다.
이렇게 빼어난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근거리에서 보다 보면 왠지 본전을 뽑은 느낌이 아니고, 완전 횡재를 한 느낌이 들 것이다.
주로 고려시대 유물들로써 고려 태조 왕건을 포함한 고려 왕들과 원주지역 토호세력 간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절터들이다.
o 거돈사터-
고려 광종(왕건의 셋째아들) 때 중국으로 유학을 가 법안종(염불정토와 선의 일치를 주장)을 배워 온 원공국사 지종이 머물다 입적한 사찰이다.
o 흥법사터-
흥법사는 신라시대 사찰로 937년(고려 태조20)에 왕사였던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하자 왕이 직접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 한다.
특히 진공대사승탑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된 소중한 유물이다.
o 법천사터-
법상종(유식사상과 미륵신앙) 사찰로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며, 고려 문종이 왕사로 모셔 법화경과 유식학 강의를 듣고 어가를 같이 타고 다닐 정도로 존경한 지광국사 해린이 머물며 입적한 사찰로 고려시대에 대단히 큰 사세를 형성했던 사찰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 뜰에 옮겨 보관했는데 6.25 때는 옥개석 부분이 조각나는 아픔을 껵기도 했으며, 현재는 파손위험으로 보수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대전)에 보존되어 있는 비운의 승탑이다.
이제는 이 승탑이 원래 자리인 원주 법천사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역 문화관광 활성화와 내수증대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차제에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대다수 석물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지역 관광활성화 붐을 조성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우리나라 폐사지의 상당수는 조선시대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서원건축에 활용되었고, 일본인의 돈에 매수된 지역민들과 장물아비들이 푼돈을 받고 팔아 넘겨 해당 지역에서 반출이 되어 일본으로 유출되거나 서울로 팔려 나갔음.
* 이렇게 조선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고 도괴된 사찰 자재들의 일부로 건축한 서원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지금은 우리나라 국민들중 극소수만 믿는 성리학이라는 이념에 경도된 조선 유생들과 그것도 지방관리에 불과한 주세붕과 같은 자가 경북 최대 불교 사찰 중 하나인 숙수사를 파괴하여 각종 금동 불상을 땅에 파묻고 석불. 석등 등 각종 석물들을 훼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건축 자재로 활용하였으며, 뒷 날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요청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음으로써 절터 파괴와 문화재 훼손이 정당화 되게 되면서, 이후 전 국토에 걸쳐 본격적인 대규모 사찰 파괴와 문화재 훼손이 시작되게 된 암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조성한 불교문화재를 훼손한 것보다 조선 유생들이 자신의 조상들이 만든 불교문화재를 훼손한 것이 100배는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일부 잘못된 기독교인들이 사찰에 불을 지르는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것(조상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자신들이 소중하게 보존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밝은 미래는 없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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