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1,000년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지어 잘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라왕릉이다.
1,000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왕릉은 그 내부와 외부의 형태 그리고 부장품으로 인해 시대별로 삶의 형태를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남기게 되는 것이다.
신라왕릉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내부는 목관묘와 목곽묘 그리고 적석 목각묘의 형태로, 외부는 봉토분과 적석 봉토분 그리고 호석 내지 12지신상 호석봉토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봉토분은 봉분을 높이 쌓고 아무 장식이 없는 형식으로 5릉, 3릉을 비롯한 박氏 왕릉 전부 그리고 3국 통일 이전의 김氏 왕릉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돌을 쌓아 무덤이 유실되지 않게 지반을 튼튼히 한 적석 봉토분으로 이에는 23대 법흥왕릉, 27대 선덕여왕릉, 29대 무열왕릉, 47대 헌안왕릉 등이 있다.
셋째, 능의 주변에 호석과 12지신상이 조각된 호석을 두른 봉토분이 있는데 이에는 28대 진덕여왕릉, 호석에 12지신상이 조각된 봉토분에는 28대 진덕여왕, 33대 성덕왕, 35대 경덕왕, 38대 원성왕,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형태의 능은 통일신라 전성기인 중기의 양식으로 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다.
경주 왕릉의 소나무 숲 중 가장 좋으며, 우리나라 소나무 숲 중에서도 5손가락 안에 드는 멋진 소나무 숲이다.
신라 13대 미추왕은 최초의 김씨 왕으로 김알지의 5대 손이다.
신라 천년 간 56대의 왕이 집권을 했는데 시조인 박혁거세를 비롯한 박씨 왕은 모두 10명이고, 4대 왕인 석탈해를 비롯한 석씨왕은 8명이며, 미추왕을 비롯한 김씨왕은 나머지 38명이다.
서악동 고분군-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46대, 47대
3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3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주변국과의 외교력- 김춘추의 역할(648년 나당연합군- 660 태종 무열왕 황산벌 전투- 김유신. 계백, 663 백강 전투- 풍.흑치상지.복신.도침.왜, 668 문무왕 연개소문 아들들의 분열, 674 안승(보덕왕)- 금마저(익산) 보덕국 설립으로 웅진도독부 견제, 나당전쟁- 675 문무왕 매소성 전투- 설오유. 문훈. 이근행, 676 기벌포 전투- 시득. 설인귀, 698 대조영 발해건설)
둘째, 가야왕국의 후손인 김유신과의 화학적 시너지 효과- 문화, 사람 융합의 힘
셋째, 내부 결속력과 전투력의 강화- 백제 고구려 유민과의 합심으로 당과 전투
3국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유민들의 마음을 얻음으로써, 경주의 외딴 위치에도 불구하고 문화 융성의 시기를 열어나갔다.
'국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녕 여행 (0) | 2020.05.29 |
---|---|
우리나라 아름다운 계곡과 숲- 최고 순위 (0) | 2020.05.03 |
경주 남산 - 거대한 야외 박물관 (0) | 2020.05.03 |
남해 여행 - 남해도 관광 (0) | 2020.03.08 |
부산 여행 (0) | 2019.12.23 |